누군가 나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평생 어쩌면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도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런 연고 없이 불쑥 앞에 나타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힘들게 입을 열어 청하는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신에게서 온 선물이라고 불리는 붉은 보랏빛 띠가 몸 어딘가에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일에 수긍하곤 했다. 소위 선택받았다고 하는 몇몇 사람들은 일생에 한번 쯤 이런 경험을 하곤 했다. 처음엔 희미하게 멍처럼 보이는 보라색 띠가 점점 진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면 그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일종의 낙인이었고, 초대장이었으며, 조금 로맨틱한 상상을 한다면 일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서약의 반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거 싫은데.”
별 생각 없이 쳐다본 손목에 수갑처럼 나타난 띠는 묵직하게 내려앉아있었다. 마타타기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어딘가에 속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저이 없었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자면 생활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연구소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발현한 미미한 형질 때문에 센티넬인지 가이드인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센티넬과 가이드는 귀한 존재였고, 보호받아 마땅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연구소로 들어가야 한다면 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곤 했다.
‘…뭐 센티넬만 아니면 되는 거지.’
게다가 완전히 연구소에 배속되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들은 어느 정도 유연한 개인 생활을 보장받았다. 폭주할 가능성이 다분한 센티넬들과 달리 가이드들은 겉보기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센티넬을 억제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 일반인이라고 불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하던 도중 정신이 나가거나 한 일이 없었으니 가이드가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짐작 할 뿐이었다.
“…그래도 역시 좀 걱정이 되는데 말이야.”
동생들을 놔두고 연구소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거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며칠 내로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나 둘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덤덤하게 새로운 곳으로 가는 초대장을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손목에 나타난 띠는 점점 진해졌다. 멍 같아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전혀 아닌 보라색 띠는 수갑을 채운 것처럼 단단하게 손목을 물어왔다.
주변을 정리하고 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동생들은 조금 불안해했지만, 마타타기가 걱정 말라고 하자 곧 수긍했다. 마타타기를 데려가기로 한 연구소 측에서 가족들에 대한 모든 편의를 봐주기로도 합의가 되었다. 한 달 정도 센티넬 집중 시설에 들어가 싱크로 조절을 끝내고 나면, 가이드가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난 것과 같았다. 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에도 충분히 출입할 수 있었다. 마타타기가 한발 먼저 떠난 집에서 하루를 더 보낸 동생들은 연구소 측에서 보낸 직원들의 손을 잡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 ✼ *
“도대체…이런 곳까지 사람을 불러 놓고 뭐하자는 겁니까?”
“조용히 해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뚝 끊어버리는 어른을 쳐다보던 마타타기는 금방 수긍했다.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고 올리다 이내 표정을 죽인 채 시선을 가로막는 어깨를 노려보았다.
“예…뭐 기라면 기어야죠. 그런데 절 그렇게 원하는 센티넬은 누군가요? 난 그런데 까칠한 사람은 별론데.”
“…….”
“뭐 말하기 싫으면 마시던가요. 하여튼…어른들이란.”
뒤에서 대놓고 툴툴대는 소리를 듣는 연구소장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지만, 언짢은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간신히 화를 내리 눌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나이에 발현한 가이드들은 센티넬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조금 멋대로 군다고 쉽게 내칠 수는 없었다. 페어끼리 훈련을 받는 독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난리법석을 느낄 수 있었다. 귀를 찌르는 소란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럽죠?”
“가이드가 제대로 붙지 않은 센티넬들에겐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
“개잡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자원인데 무슨…좀 소중하게 대해주는 편이 낫지 않아요?”
“…….”
“아 뭐, 네. 말이 좀 길었네요.”
어른들이란. 마지막 한마디 덧붙이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이중 삼중으로 단단하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지막 철문을 열고나서야 마타타기는 자신을 그렇게 불러대던 파트너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잔뜩 성이 난 들개 한 마리였다. 하얀 털을 가진 녀석은 온 방안을 제멋대로 헤집으면서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목에 묶여있는 단단한 쇠사슬 목걸이도 모자라 네 발을 구속한 가죽 족쇄가 연신 절그럭 거리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게 뭡니까?”
“센티넬이다.”
“예? 농담하지 마시고 진짜 이야기를 좀 하는 게 어떨까요? 어딜 봐도 미친 개ㅅ…아니 개인데.”
“가이드가 좀처럼 붙지 않아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로 변해 있는 거다. 네 녀석이 조금만 일찍 도착해도 이 녀석이 이럴 일은 없었을 거야.”
“그래서…덮어씌우시려고요?”
“흠. 흠.”
들어가 봐라. 등을 떠미는 힘에 못 이겨 안쪽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씩씩거리는 호흡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던 것 같았다. 절그럭 거리는 사슬 소리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커다란 흰 물체를 내려다보던 마타타기가 한걸음 다가섰다.
“…어어. 쉿.”
“…….”
“그렇게 이를 드러내면 어쩌려고? 가만히 있어.”
목덜미에 걸린 가죽 목걸이를 잡아채는 순간 네 발의 힘이 풀린 짐승이 바닥에 스르르 쓰러졌다. 품안에 한가득 들어오고도 남은 녀석을 어설프게 끌어안은 마타타기가 도움을 청했다.
“아니 이거 뭔데요!”
“…….”
“아니 이거 좀 어떻게 해봐요!! 계약이고 뭐고 아니…아 진짜. 이게 뭔데 도대체!”
“데려가. 정식 계약서는 정신이 들면 하지.”
“좀 말 좀 해주고…아니!!”
“어서 데려가.”
품 안에서 떨어진 짐승은 곧 이동용 침대에 올라갔고, 그새 흰털이 잔뜩 붙은 옷을 털던 마타타기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많은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따로 지정받은 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벽 양쪽에 붙은 침대 중 하나에 흰 개를 던져놓은 연구원들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간단한 짐 가방 하나만 들고 들어온 마타타기는 그 옆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저 녀석이 뭐?”
“…….”
“야, 말 좀 해봐라.”
“…….”
“나도 모르겠다. 내일 되면 뭐라도 되겠지.”
막상 말을 해봐야 할 상대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기다려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몫으로 마련된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 낯선 매트리스가 허리에 닿았다. 더듬더듬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긴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눈이 감기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서로 다른 숨소리가 사분사분 섞여 들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누군지도 모를 녀석이 집 안에 들어앉아 나가질 않았다. 나이트윙와 로빈, 그리고 비스트 보이가 본부에 있을 때 나타났다는 녀석은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라고 했다. 시끄럽고, 산만하고 작은 녀석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영 저스티스로 굴러들어온 임펄스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이트윙의 미간에 하나 둘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다.
“저기…나이트윙? 내가 왜요?”
대뜸 눈앞에 들이밀어진 낯선 갈색 물체를 두 손으로 쭉 밀어내며 뒷걸음질을 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두 손을 잡고 붕붕 소리가 날정도로 흔드는 녀석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누가 제일 익숙하냐고 물어봤더니 블루비틀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에 데려왔다.”
“전 저 녀석 누군지 모르는데요.”
“…응?”
“저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는 거 아닌가요. 전 정말…….”
“아 저기 블루? 블루? 블루? 블루?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물론 날 모를 수도 있어. 지금부터 알면 되는 거 아닐까?”
“…….”
할 말을 잃었다.
어느새 엉겨 붙은 둘을 바라보던 나이트윙이 무선 통신기를 켰다.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비록 통신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은 역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 뭐라고요? 알겠습니다. 나이트윙 아웃,”
여기서 한 번 태클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고 정신을 쏙 빼놓는 녀석 때문에 슬슬 멀어지는 나이트윙에게 말을 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이트윙이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일 때는 이미 늦어 도저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라진 나이트윙은 간 곳이 없었고, 황량한 공터엔 시끄러운 갈색 생물체만 남아있었다. 조용한 장소에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 팔을 꽉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입을 막았다.
“입 좀 다물어봐. 시끄러워.”
“으어흐어.”
“말 하지 말라고! 야, 간지러워!”
끊임없이 웅얼대는 입술이 손바닥에 붙어올 때마다 하이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저히 입을 다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입에서 손이 떨어지자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하이메를 바라보던 임펄스가 쪼르르 옆에 와서 앉더니 또다시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탄로날까봐 잔뜩 신경을 쏟고 있는데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근데…어…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 바트 앨런. 물론 저 쪽에선 날 임펄스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고. 근데 둘 다 상관없어.”
“저기…시크릿 아이덴티티는?”
“그게 뭐가 중요해? 하. 정말 이 시대는 쓸데없는 걸 너무 신경 쓴다니까. 안 그래? 친구.”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들을 만한 녀석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 먼저 항복한 쪽은 하이메였다. 벤치에 앉아 부산스럽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임펄스는 조금만 바라봐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 우리 통성명은 제대로 안했지만 친구라고 치고, 시크릿 아이덴티티 오픈했다고 치자.”
“응? 블루. 왜?”
“일단…일단 말이야. 너 혹시 다른 옷은 없냐?”
“왜?”
“그렇게 입고 다니면 튀잖아. 미래에선 뭐 그다지 상관없다 하더라도 여긴 아냐. 알았어?”
“…딱히 가져온 거 없는데?”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넙죽넙죽 대답하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시간 여행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가. 한참 말을 고르던 하이메가 바트의 손을 덥석 잡고 일으켰다. 순순히 따라오는 녀석을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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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가볍게 명령만 하면 충분했다. 손짓 한 번이면 어지간한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로드의 성 내에서 콘에게 안 된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콘이 직접적으로 소유욕을 드러내진 않았다. 언제나 비슷하게 재미없는 일상이었고, 그런 생활 속에서 딱히 무엇인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재미없어.’
흔한 장난감 하나 마련되지 않은 방에서 콘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는 일 정도였다. 로드가 실권을 쥐고 있는 성에서 콘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약간의 필요한 공부와 사찰이 끝나면 어디를 돌아다니던 그다지 제약을 받지 않았다. 하루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고, 다음날은 하늘에 떠서 해가 가장 높은 곳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대지에 길게 빛을 늘어뜨리면 온몸 가득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치 피가 흥건히 젖어든 것 같은 착각이 들면 온몸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를 쳐다보고 온 날은 꼭 꿈을 꾸었다. 제대로 된 사물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의 꿈을 꾸었다. 새빨간 불처럼 일렁거리다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콘은 언제나 혼자였다. 축축 발목에 감기는 의식을 걷어내면서 한없이 걸었다. 두 손에 척척 감기는 그림자를 억지로 뜯어내면 피처럼 빨간 자국이 덕지덕지 남았다. 한참동안 꿈에서 깨지 못하다 간신히 눈을 뜨면 새벽이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가슴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부옇게 흐린 안개 너머로 천천히 해가 밝아왔다. 재미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
그렇게 재미없는 삶을 살던 콘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처음 만난 것은 로드를 만나러 온 배트맨의 뒷자락에서였다. 사실 콘은 배트맨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배트맨이 가끔 로드의 성으로 들어오는 날엔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굳이 자신의 손님도 아닌 배트맨을 나서서맞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게다가 성안의 그 누구도 콘의 생각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날도 일찌감치 밖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계속 누군가와 부딪히면서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보통 때면 당장 화를 냈겠지만,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겨우 밖으로 나가는 문 가까이 갔을 때, 누군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
자신이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무겁게 열리는 성문 가운데 배트맨이 서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부딪혀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런 콘을 잠시 바라보던 배트맨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항상 입고 다니는 긴 회색망토가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울 안에 감춰진 얼굴은 언제나 변화가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 천하의 배트맨이 몸소 로드의 성 안으로 들어오고.’
길게 이어지는 망토를 바라보던 콘의 눈에 낯선 옷자락이 들어왔다.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과 다른 검은 망토가 배트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끔 배트맨이 데리고 오는 나이트윙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하얀 망토를 걸치고 있어야 했다.
‘…누구지?’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동안 바라봤지만, 긴 망토를 두른 채 목덜미를 길게 덮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배트맨을 따라 저 멀리 복도 안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을 쯤 되어서야 콘은 가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트맨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성으로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온 콘이 손가락을 우득우득 꺾었다. 딱히 성문으로 들어갈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다시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찌를 듯 높은 담장을 가볍게 넘어 테라스에 닿았다. 콘의 취향은 아닌 곳이었다. 화려한 꽃이 잔뜩 피고, 깔끔하게 관리된 테라스는 누가 봐도 로드의 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꽤 풍성하게 자라 손끝에 스치는 장미를 한 송이 꺾어 들었다. 너무나 섬세한 꽃잎을 가진 장미는 꺾기위해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와작 우그러져 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손을 들어 툭툭 털어버리자 우그러진 붉은 꽃잎이 발아래 하나 둘 떨어졌다. 콘은 약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치는 것도 별로였다. 몇 번 더 꽃을 꺾어보려 했지만 번번이 우그러지자 금방 싫증을 냈다. 테라스에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아까 봤던 낯선 사람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딱히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설핏 잠이 들었다. 시계 소리를 포함한 흔한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은 그대로 멈춰있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콘이 돌아누울 때마다 사박사박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콘이 눈을 뜨기 전까지 방안엔 숨소리만 사분사분 내려앉곤 했다.
***
배트맨은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저스티스 로드에 속해있으면서도, 언제라도 로드에게서 등을 돌릴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곤 했다. 콘은 로드를 만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인간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 하곤 했지만, 번번이 말끝을 잘린 채 입을 다물어야했다. 로드는 콘을 꽤 편하게 풀어주곤 했지만, 일정한 규칙을 어기면 불같이 화를 냈다. 로드가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콘은 입을 다문 채 억지로 불만을 삼켜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뭐라고 해도 배트맨은 저스티르 로드 소속이었다. 게다가 로드 숲 바로 아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인간이지만 아무나 함부로 대할 만한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불문율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콘도 마찬가지였다. 콘은 로드의 후계자였지만, 아직 저스티스 로드에 속한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배트맨은 슬하에 친자 하나와 양자 셋을 두었다 했는데, 그 아들도 아비를 보고 자랐는지 언제나 로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그나마 넷 중에 로드에 속해있는 나이트윙이 언제나 중간에 서서 중재를 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로드 멤버를 봤고, 또 익숙했다. 하지만 배트맨이 로드에게 내보이는 사람은 나이트윙이 전부였다. 그렇게 배트맨과 나이트윙의 보호아래에서 자란 아이들 중 팀은 유난히 경계가 심했다. 아니 경계가 심하다고 말하는 것보단 딱히 로드 쪽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배트맨 아래에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고 말했다. 배트맨은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아들을 감싸고도는 것인지 좀처럼 집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팀이라고 했던가.’
계속 저번에 봤던 모습이 눈에 떨어지지 않아 수문장과 시종들을 다그쳐 알아낸 이름이었다. 팀. 팀 드레이크. 팀 드레이크 웨인. 입안에서 몇 번이나 툭툭 걸리면서 지나가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어보았다. 어쩐지 그 이름이 뒷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면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그날 이후 팀은 로드의 성에 출입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연구 할 것이 있다거나 배트맨 쪽 일로 다른 곳에 출장 중이라는 교묘한 이유를 대면서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보면서 과하게 몰입하는 쪽은 콘이었다. 이렇게 계속 시선을 끄는 일은 처음이었다. 항상 재미없고 똑같이 흘러가던 하루에 조금 다른 조각이 끼어들었다. 그 조각은 생각 외로 단단하고 뾰족해서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언젠간 꼭 저 검은 망토를 손수 벗겨내고 하얀 색을 덮어씌워 주리라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그러했을 뿐 여전히 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시간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다. 콘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할수록 귀찮아지는 쪽은 팀이었다. 결국 로드의 명령에 못 이겨 몇 번 성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딱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배트맨과 나이트윙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을 때인 이유도 있었다. 자신 말고 성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성을 찾았다. 몇 겹이나 되는 무거운 문을 지났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문이 안쪽으로 열리면 그 앞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열 걸음 정도 걸은 후 잠시 기다리면 두 번째 문이 열렸다. 몇 번이나 걸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간결한 장식이 드문드문 붙어있는 긴 복도를 지나고 몇 번이나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성 안쪽으로 걸어들어가고도 모자라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접견실이 있었다. 문이 열릴 때 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리석이 틈 하나 없이 맞닿아 넓은 바닥을 만들었다. 가만 내려다보면 흐릿하게 인영이 맺히곤 했다. 붉은 양탄자를 가볍게 밟으며 로드 앞으로 걸어갔다. 한쪽 손을 가볍게 가슴에 올리고, 반대쪽 팔을 곧게 펴 망토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 허리를 숙였다.
“로드께 인사를 올립니다.” “…….” “마침 집안에 아무도 없어 부득이하게 제가 성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여 따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배트맨과 나이트윙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
가볍에 턱으로 서류를 건네줄 사람을 지목했다. 팀은 그럼 행동에 토를 달지도, 의문을 가지지도 않은 채 가늘게 웃었다. 영악한 아이는 이런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로드.” “…….” “알겠습니다.”
사실 들어올 필요가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할 대답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나이트윙도 아니고, 로드에 제대로 속해있지도 않은 아이에게 로드가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류를 가까이 서있는 시종에게 넘기고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다시 허리를 들어 로드를 잠시 바라보곤 그대로 돌아섰다. 어깨를 감싸며 흘러내린 검은 망토가 접견실을 벗어나고, 묵직한 문이 닫힐 때까지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럴 거면 왜 급하게 불러들였던 거야.”
차마 로드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성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게 내려앉아서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나마 바깥으로 향한 복도를 돌아 들어가면 아치형으로 뚫린 창으로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은 숨만 턱턱 막혀왔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 팀의 앞을 막아섰다.
“…….”
걸음을 급하게 멈춘 팀이 약간 아래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누군가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길을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 “…….”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파란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채 가려지지 않은 욕망의 눈길을 팀이 모를 리 없었다. 생각보다 조금 덜 자란 아이와 너무 빨리 자란 아이가 서로 마주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팀이었다.
“팀 드레이크. 로드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 “그럼 이만.”
로드에게 하는 것처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어깨를 덥석 잡은 손이 그대로 팀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부딪힌 몸이 고통에 바르작거렸다. 잔뜩 찌푸린 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지며 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단하게 잡힌 어깨는 콘이 힘을 쥘수록 부서질 듯 아파왔다. 팀은 간신히 두 손을 움직여 콘의 팔뚝을 잡고 밀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저…….” “…….”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어깨를 부서질 듯 쥐던 콘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갈수록 어깨에 하나 둘 피멍이 내려앉았다.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들려 올라간 다리는 축 처진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하더라도 함부로 반항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참고 나서야 콘이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다. 두 손을 놔주자 날씬하게 뻗은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허억…헉.” “왜…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지?” “…….” “내가 물었다. 팀 드레이크.” “왜냐면 굳이 당신과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드의 후계자시여.” “…….” “전 아직 로드에 속하지 않았으니…사적인 만남을 가질 이유도 이런 불합리한 명령을 따를 이유도 없습니다.” “…….” “부디…저와 만남이 필요하시다면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주시길…부탁드립니다.” “…….”
어깨를 감싸 쥔 팀이 고통이 섞인 긴 신음소리를 바닥에 흘려보내고 나서야 천천히 질문에 대답했다. 고통에 못 이겨 잔뜩 식은땀이 배어나온 이마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하나둘 붙어있었다. 목소리는 아픔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없이 차분했다. 또박또박 콘의 물음에 한마디 한마디지지 않는 입은 가늘게 꼬리를 올린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약간 긴 머리가 잔뜩 젖은 턱 선을 따라 붙어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흐릿한 미소에 콘은 다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럼 로드에 속하게 되면 날 봐줄 수 있나?” “글쎄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습니다만, 제가 로드에 들어올 확률은 극히 낮은 것 같습니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그럼.”
왼쪽 어깨를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난 팀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을 빠져 나갔다. 그날 처음으로 팀의 얼굴을 봤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서 시선을 올려 콘을 바라보았다. 쨍할 정도로 파란 시선은 날카롭고 곧게 뻗어있었다. 로드의 후계자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팀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큰일 날 뻔 했네.’
팀은 잔뜩 긴장한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급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드의 후계자인 콘-엘의 성격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콘은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로드를 만나는 것보다 더 정신력을 소모하곤 했다. 그렇기에 굳이 콘과 연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은 팀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러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인생이 조금 귀찮아질 것 같았다. 어지간히 눈치가 빠른 터라 콘의 눈에서 타오르는 소유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해 그것만을 바라보는 어린애와 같은 눈빛이었다. 콘의 시선은 언제나 팀을 향하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 왜 이리도 한 사람에게 집착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총애가 깊어져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몇 번이고 그 욕망을 받아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몸 한 번 내주는 것이 그리 어렵겠냐만, 확실한 약조도 미래에 대한 보상도 없는 곳에 굳이 걸어들어 갈 이유는 없었다.
“…윽.”
무심코 팔에 힘을 주었는지 어깨가 빠질 듯 아파왔다. 분명 옷을 벗으면 시뻘건 손자국이 온몸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왈칵 기분이 나빠졌다. 잠시라도 이 성에 남아있지 싫은 팀은 급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성을 빠져나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
그렇게 팀을 보내고 콘은 자신의 방에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던 콘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에 왈칵 눈을 찌푸렸다. 간질간질 심장을 간질이다가 어느새 머릿속에 숨어든 기묘한 느낌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몸 가장 깊은 곳에서 계속 돌아다니면서 콘을 괴롭히고 있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 솟구치자 짜증이 났다. 옆으로 휘두른 주먹에 맞은 벽이 쩍쩍 금이 갔다. 아무리 몸으로 짜증을 표현해도 가시지 않았다. 넓은 가슴 속에 또아리를 틀고 답답하게 들어앉은 것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장을 옥죄며 단단하게 뭉쳐졌다. 숨을 쉬기 불편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줬고, 점점 제대로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왜 이러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배운 학문 중에선 비슷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학자들과 선생은 콘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줬지만, 그 지식으로는 이번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배운 기억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럴수록 심장은 점점 더 답답해져 갔다. 로드는 자신의 후계자인 콘이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콘이 스스로 원해서 섞인 유전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포함된 것을 긁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적어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그 것을 최대한 억누르고 크립토니안에 가까워지길 주문했다. 콘도 그런 명령에 그다지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인간을 버리려 했기에 그렇게 많은 감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불편하진 않았다.
결국 몇 번이나 생각을 하고, 그에 따른 답답함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참는 것보다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늘 그래왔었다.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방을 거의 부수게 될 무렵 어렴풋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가 그 녀석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두 눈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을 위한 선물을 원하는 얼굴은 그 다음 일어날 상황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손에 원하는 것이 들어오면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어째서 팀 드레이크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뒷모습을 한번 봤고, 오늘 얼굴을 겨우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 전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이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두 손목을 잡아 누르고 배트맨의 상징인 검은 망토를 찢어버릴 것이다. 배트맨을 도와주는 울새였지만, 그 정도로 콘을 막을 순 없었다. 그녀석이 로빈이라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몸에 직접 하얀 망토를 둘러준 후 이 성에 영원히 박제할 생각이었다.
“…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가에 날카로운 웃음이 흘렀다. 손에 깍지를 끼고 이마를 댄 채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콘이 웃기 시작했다. 작게 흐느끼듯 웃던 웃음은 점점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즐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무료했던 일상에 작은 기쁨이 돋았을 때 콘은 좀처럼 흥분은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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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 전연령]
Sentinel Verse AU : Jason x Roy
❝ Vulpes vulpes ❞
001 – 000
Sentinel : Roy Harper (Full name)
Guide : Jason todd (Full name)
Ⅰ. Sentinel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하다면 어떨까. 게다가 그 사람이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이고,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나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꼭 필요하다면 과연 인생을 바칠 수 있을까. 만일 그에 응하지 않았을 때, 잠시나마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보통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잠시 생각한다면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이드들은 보통 일생에 한 번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가끔은 자신의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저 멀리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에서 홀연히 찾아오기도 했다. 가이드들은 팔 어딘가에 붉은 보라색의 띠가 떠오를 때면 항상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정리하곤 했다. 그것은 센티넬 연구 시설로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초대장이었고,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 생겼다는 의미키도 했다. 물론 가끔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면서 비즈니스적인 관계로만 만나는 사이도 있었지만, 그것은 정말 특별한 케이스 중의 하나였다.
“…….”
샤워하기 위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제이슨은 팔뚝에 희미하게 나타난 보랏빛 띠를 보고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체질이 가이드란 것은 성장기를 지내면서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가이드로 살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보통 2차 성징 전후로 자신의 짝을 찾는 가이드들과 달리 스무 살 가까이 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자신을 찾기 전에 반쪽인 센티넬이 죽었을 거로 생각했다. 반쯤 잊고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찾아온 초대장은 너무나 무거웠다. 그래서 잊고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진하게 나타나는 보라색 띠는 마지 피멍이 든 것처럼 팔뚝에 천천히 번져갔다.
그리고 완전히 내려앉아 지워지지 않을 정도가 되자 기관에서 사람이 나왔다. 이런 건 기막히게 잘 알아낸단 말이지. 커다란 웨인 저택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사람들은 곧장 제이슨을 찾았다. 센티넬 기관은 거역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그들 앞에 섰다. 그러자 눈앞에 하얀 종이에 빨간 직인이 찍힌 종이를 들이밀었다.
“제이슨 토드. 센티넬 기관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한동안 찾지 않아서 그냥 편하게 사려나 했는데.”
“…여러 번 말하지 않겠다. 오늘 내로 짐을 정리해서 기관으로 들어오도록 해라.”
“저기…아무리 센티넬이 중요하다 해도, 결국 그 짐승들은 다룰 수 있는 건 가이드일건데. 이거 취급이 너무 한 거 아냐?”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아, 예. 알겠습니다. 기라면 기어야죠.”
뒤에 이어지는 말을 채 듣지 않고 문을 쾅 닫아버린 제이슨이 짜증스럽게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런 제이슨을 바라보던 딕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제이슨과 같은 가이드로 발현한 딕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안 그래도 성격이 불같은 제이슨이 혹여 사고를 칠까 걱정을 할 뿐이었다.
***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곳으로 억지로 발을 디딘 제이슨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그게 말이 좋아 센티넬 센터지 이건 그냥 국가에서 필요한 생체 병기를 만드는 곳이었다. 필요한 기계 외엔 이렇다 할 장식도 붙어있지 않은 새하얀 공간은 마치 연구소처럼 소독약 냄새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웅웅 울릴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곳은 공기조차 너무 무겁고 건조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 안에 가득 쌓이는 알콜 냄새가 메스껍게 올라왔다. 안 좋은 추억을 잔뜩 담은 너무나 익숙한 소독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 제이슨이 가볍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숨을 쉬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자 곧바로 뒤를 돌아보는 눈이 싸늘했다.
“왜 그러나.”
“…개인적인 기억이니까 신경 끄시지. 난 여기서 조금도 더 있고 싶지 않아. 일이 끝나면 녀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그건…….”
“여기서 살라고 하면 난 가이드로 해야 할 모든 걸 거절하겠어. 단 한 순간도 이런 소독약 냄새나는 곳에서 있고 싶지 않아!”
“…….”
“뭐…싫으면 할 수 없고.”
“그건 내가 나중에 따로 장부를 올리도록 하지. 일단 그런 것보다 센티넬이 먼저다.”
“어련하시겠어.”
“이쪽으로 와라.”
딕이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도, 팀이 그랬을 때도 함께 이곳을 찾아왔었다. 모두 그리 어렵지 않게 센티넬을 맞이했다. 물론 가까운 곳에서 짝을 만났기 때문에 좀 더 간편한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연구소 입구에서 소독약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뒤돌아서는,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시간이 지나갔다. 가이드로 발현하고 나서도 등록 절차를 밟기 위해 딱 한 번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눈앞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들이 서로 계약을 맺고 있었지만 이렇게 수상한 곳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언제나처럼 금방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만남은 좀처럼 성사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안쪽으로 들어가고, 복잡한 복도를 돌아들어 갔다. 장식조차 없는 하얀 복도는 인공적인 빛이 반사되어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났다. 그러다가도 이내 어둠에 푹 잠기곤 했다. 몇 겹의 보안 시스템을 거치고 나서야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잠자코 따라오도록 해.”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
툴툴거리면서도 꾸준히 뒤를 따르던 걸음이 서서히 멈췄다. 교관의 등에 코를 박을 뻔했다.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도대체 말을 하고 멈추던가. 속으로 연신 욕을 하던 제이슨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
숨 한번 내쉬기도 어려울 만큼 하얀 공간 안에 무엇인가 축 늘어져 있었다. 분명 하얗고 밝은 방이었지만 좀처럼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위험한 놈인지 어른 손바닥만큼 두꺼운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전면 창엔 여기저기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어서 들여다보라는 듯 교관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기에 뭐가 있는데 이러는 겁니까.”
“…….”
“나 참. 입이 붙었나.”
“…….”
낮게 욕을 내뱉으며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유리 안을 쳐다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붉은 털을 가진 짐승 한 마리만 널찍한 방 안에 축 늘어져 있었다. 꽤 난동을 피웠는지 그늘 하나 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방 안은 푹푹 패인 자국이 선명했다. 게다가 채 지워내지 못한 핏자국도 남아있었다. 할딱할딱 숨이 넘어갈 듯 얕은 숨을 쉬는 짐승의 등을 바라보던 제이슨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리 말을 안 듣는 동물이라고 해도 저렇게 엉망인 상태로 내버려둔다는 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죽어 넘어갈 거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센티넬? 이게?
“…그래서 설마 저 짐승이 내 센티넬이란 건 아니겠죠? 조금 머리가 이상해 진 거 아냐?”
“사람이다.”
“정말 내가 미친 거면 미쳤다고 말 좀 해주라고! 당신 눈엔 저게 사람으로 보여? 어?”
“…지금은 아니지만.”
“진짜 미치겠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센티넬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군.”
“…뭐?”
“난 이것저것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이야기하도록 하지.”
“…….”
가볍게 고개를 저은 교관이 패드를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얼굴에 마스크를 단단히 두른 사람들이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구석에 쓰러져있는 짐승에게 마취약을 몇 번이나 찔러넣었다. 저항할 힘도 없는지 주삿바늘이 피부를 뚫고 갈 때만 잠시 버둥거리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몇 번 쿡쿡 찔러가며 확인을 한 사람들이 입에 단단한 가죽 재갈을 물렸다. 그것도 모자라 다리를 단단히 족쇄로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서야 이동용 침대에 눕혔다. 가죽끈으로 다시 한 번 온몸을 교차해 묶고 나서야 천천히 방 안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게.”
“…….”
그것을 지켜보던 교관이 좀 더 안쪽에 마련된 곳으로 제이슨을 데려갔다. 잠자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제이슨은 처음으로 가이드와 센티넬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 살 가까이 되도록 제이슨의 짝인 센티넬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집안 그 누구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가이드는 센티넬이 없으면 일반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따로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희미하게 사전적으로 습득해 알고 있는 지식 외엔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이제야 날 찾는 센티넬이 저런 놈이라고? 어딜 봐도 약에 절은 여우 새끼잖아.”
“제이슨 토드. 한 번만 말하겠다.”
“…….”
“센티넬의 힘의 원천은 각자가 가진 동물의 특성에 기인한 것. 가이드는 그 특성을 눌러줌과 동시에 최고로 힘을 개방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다. 아무리 잘난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오감이 터져나가면 버틸 수 없으니까 말이다.”
“…….”
“제 주변에 가이드가 없으면 점차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사라지고 동물의 본능이 살아난다. 인간으로는 예민해진 감각을 버틸 수 없으니까. 그러다가도 안 되면 점차 동물의 모습으로 변해가지.”
“그렇다면 저 녀석은…….”
“좀처럼 맞는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아서 간신히 목숨만 살리려고 따로 격리해뒀던 거지. 저것도 간신히 임시 약물과 마취제, 진정제를 죽기 전까지 밀어넣어서 살려 둔거고.”
“그런데 내가 나타났다?”
“따지자면 완벽하진 않아. 지금 등록된 가이드 중에서 네가 가장 높은 싱크로를 보이고 있을 뿐이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이슨 토드. 지금 이곳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런 태도는 나아가서 가이드로서 평가에 흠이 될 수 있다.”
“…….”
“어지간한 사안이 아니며 너같이 경력도 없는 가이드를 불러내지 않았을 거다.”
“…….”
딱히 그런 평가에 대해 신경 쓴 적은 없었지만, 일단 센티넬이 붙기 시작하면 말이 달라졌다. 센티넬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은 가이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평가였다. 소위 1% 안에 드는 가이드들은 그만큼 몸값이 높고 대우도 좋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혹시 각인된 센티넬이 죽더라도 다른 센티넬의 임시 가이드로서 우선 배속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도 있었다. 적어도 평가만 높으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소리였다.
잠깐 말을 멈춘 교관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좀처럼 말하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캐묻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며 다 알게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좀 이유가 많은 녀석이다. 등록된 가이드 중에 어지간한 사람을 다 데려다 놓고 각인이라도 시키려 했지만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더군. 네가 마지막이다.”
“내가 마지막이란 건?”
“너조차 실패하면 가망이 없다는 소리지. 저곳에서 평생 저렇게 약으로 간신히 목숨이나 부지하던가. 그것도 못 버티면 죽겠지.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은 다루기가 힘들어.”
“정말…물건으로밖에 보지 않는군.”
“그러는 너도 저 녀석으로 인해 평가를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 피차 똑같은 상황이지.”
“…….”
“더 할 말이 있나?”
“…….”
“뭐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센티넬과 가이드가 맺어지는 계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로 등록된 프로필을 교환하고, 공식적으로 마련된 용지에 가볍게 사인만 하며 끝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끝난 절차에 약간 허탈함을 느꼈다. 제이슨이 머리를 쓱 쓸어 올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멀쩡한 센티넬을 맡는다 해도 생전 처음 만난 사람끼리 익숙해지려면 몇 주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저 여우 상태를 보아하니 몇 달 동안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일단 친해지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그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딱히 그럴 의리는 없었지만 잠시 집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들었다.
「…그래. 그렇게 됐다.」
「제이슨. 어디서 지낼 건데.」
「따로 세이프 하우스를 마련해 주기로 했어. 여기선 도저히 머물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게 어디냐고.」
「알아서 뭐하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다 말할 테니까 제발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마!」
「난…그게 아니고. 알았어. 어차피 그렇게 된 거라면 곧 연락이 오겠지. 몸조심하고. 밥 거르지 말고.」
「누가 보면 내가 일곱 살 먹은 애새낀 줄 알겠다.」
「조만간 한 번 집에 들러.」
「알았어. 알았어. 끊자. 센티넬 내려온다.」
「그래. 다시 연락해.」
「알았다니까.」
「괜찮아지면 집에도 들어오고 그래. 다들 걱정하니까.」
「…….」
그리 길지 않은 통화가 끝났을 때, 제이슨은 정말로 자신이 한 사람의 인생을 떠맡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늘게 내려앉은 책임감이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구간 재판 : R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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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Dawn
“…브루스?”
“…….”
“브루스. 일어났어요?”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침실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두껍고 어두운 천으로 만든 커튼은 밖에 들어오는 빛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두 장의 커튼이 맞닿은 틈 사이로 간신히 스며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침대에 길게 줄을 그으며 뻗어나갔다.
“으응.”
“…….”
“브루스. 답답해요.”
끈적끈적 늘어지는 목소리가 베개에 묻혀 사라졌다. 푹신한 베개에 잔뜩 얼굴을 묻고 자고 있던 인영이 끙끙거리고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뒤척거림이 조금 거칠어지자 이불사이에서 발끝이 보였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발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다 이내 어둠 속에 녹아내렸다. 두 쌍의 발 중 조금 작은 쪽이 탄탄한 종아리에 붙어오다 이내 이불 안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깜박깜박.
잔뜩 졸음이 붙은 눈이 느리게 움직이다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곤 몸을 조금 웅크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막 잠이 깬 손이 느릿하게 팔뚝을 더듬으며 틈을 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 안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딕이 결국 브루스를 불렀다. 약간 잠긴 목소리가 귀에 감기자 브루스가 살짝 한쪽 눈을 뜨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을 쳐다보았다.
“좀 놔주지 않을래요?”
“…….”
“이렇게 있으면 내가 얼굴을 볼 수 없잖아요.”
“…….”
“아직 자는 거 아니죠?”
“…….”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을 이리저리 밀어보다 살며시 포기한 채 몸을 몇 번 비틀어서 빙글 돌아누웠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구겨졌다. 맨발이 밀어내는 시트는 발끝을 중심으로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여전히 허리에 감긴 탄탄한 손목을 손끝으로 톡톡 건들이곤 했다. 이내 손가락이 팔을 따라 올라가고 가슴부근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손가락에 걸리는 자잘한 상처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우뚝 멎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길은 잔뜩 시달린 허리에 알싸한 통증을 선사했다. 딕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가 싶다니 동그랗게 잘생긴 이마가 브루스의 가슴께에 닿았다. 약하게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 마다 어젯밤 기억을 가득 담은 달달한 숨이 훅 내려앉았다. 살 냄새와 숨소리, 그리고 가라앉은 청년의 목소리가 안데 뒤섞인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아닌 듯 했다.
“도대체 언제 돌아올 거죠?”
“…….”
“며칠 동안이라고만 말해줬지, 다른 말은 없었잖아요. 제대로 말을 못할 정도로 오래 걸리나요?”
“그렇진 않겠지.”
“또 로드의 변덕이신가보네요.”
“…딕.”
“침대에서 하는 사적인 말은 새어나가면 안 될 텐데 말이죠.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
제법 맹랑한 농담을 던지던 딕이 허리 뒤로 감긴 브루스의 손을 풀어냈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등허리를 느긋하게 쓸어 올리는 손길에 잠시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았지만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다.
배트맨이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좀 무리를 했더니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울리고 하반신이 욱신거렸다. 분명 며칠 동안 고생할 것이 뻔했다. 집요할 정도로 온몸에 내려앉은 흔적을 바라보던 딕이 손가락 끝으로 쇄골 바로 위를 꾹 눌렀다.
“브루스, 나 먼저 일어나요?”
대답이 채 들리기도 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침대를 쑥 빠져나왔다. 푸른 시선이 등에 닿을 때 마다 몸 안쪽부터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더니 이내 허리를 살짝 굽혀 발밑에 구겨진 유니폼을 주워들었다.늘씬하게 빠진 허리부터 예쁜 근육이 박혀서 만들어진 몸에 희미한 달빛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실루엣을 선사했다. 탄탄한 허리부터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까지 쭉 훑어 내리던 시선은 나른하게 발목께에 머물렀다. 툭 튀어나온 복사뼈를 지나면 두껍게 깔린 카펫을 밟고선 발이 보였다.
“이걸 이렇게 마구잡이로 찢어버리면 뭘 입으란 거죠? 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
“사실 찢어도 상관없지만. 혹시 화난 거 아니죠?”
“…….”
“아, 재미없어라.”
여전히 브루스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딕 또한 딱히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어 조금이라도 대화를 통해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브루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딕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팔을 위로 쭉 뻗어 크게 기지개를 펴자 예쁜 근육이 고르게 박힌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허벅지 근육이 쭉 당겨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며칠은 허리가 아플 거 같아요. 안 그래요?”
“…….”
“정말 한마디도 안할 생각이에요?”
“그런가.”
“물론이죠. 지금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 해서 내 허리가 괜찮은 것은 아닐 테니까.”
두 손 가득 들어 올린 유니폼은 반쯤 찢어져 도저히 다시 입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만히 옷을 바라보다 휙 던져버렸다. 미끈한 다리를 움직여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듯 문을 열자 같은 디자인의 옷이 빼곡하게 걸려있었다. 연신 재잘재잘 떠들던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매끈한 몸의 라인을 그대로 보여주는 딱 달라붙는 옷을 다 입고 나서야 간신히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휘휘 돌려서 망토를 찾던 딕이 침대 밑에 버려지듯 떨어진 것을 찾아냈다. 흰 망토와 푸른 어깨 장식. 항상 걸쳐 입을 때마다 유난히 무게가 더해지는 것 같은 망토와 장식이었다.
“…….”
제법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장식은 푸르게 빛났다. 잘그락 잘그락 한참동안 쇠붙이가 맞닿는 소리가 나더니 망토가 등 뒤로 길게 늘어졌다. 겉과 속의 색깔이 다른 망토를 가볍게 한손으로 말아 쥔 딕이 침대 곁으로 걸어와 냉큼 걸터앉았다. 딕이 손으로 매트리스를 누르며 허리를 쭉 빼자 무게를 그대로 받은 침대가 매끈한 스프링소리를 내곤 했다.
어지간하면 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배트맨의 고집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한 딕이 브루스의 입술을 부드럽게 탐하다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살 쓸어보곤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다 손목이 잡힌 채 뒤로 넘어갔다.
“재미없어요.”
“…….”
“농담이에요. 최대한 일찍 돌아와 줘요. 이 저택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너무 넓어서 기분이 이상하니까.”
“그렇게 하마.”
“동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지킬 거니까.”
“그래.”
“키스 안 해줄 건가요? 며칠 동안 못 볼 거 같은데? 아니면 내가 다시 할까요?”
“…….”
뒤로 넘어진 그대로 종알종알 떠드는 딕의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느릿하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가는 침실엔 가쁜 숨이 섞여들었다. 이불을 꽉 잡은 손에 힘이 풀어질 때 까지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탐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딕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힘이 다 빠진 채 브루스의 배를 베고 누운 채 늘어져서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럼 나 먼저 나가요?”
“…….”
“조금 있다 봐요.”
침대에 누워있느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쓸어넘긴 딕이 단단하게 잠긴 문을 열었다.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만 열고 날쌔게 문을 빠져나갔다. 브루스는 그런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지켜야 하는 딕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침실에서 나가는 것은 시간차를 잠자코 따라주며 아무것도 아닌 척 포장하는 장단에 슬슬 맞춰주곤 했다. 사실 브루스에겐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절대적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딕이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루스와 함께 있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손아래 동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유달리 못 견뎌했다.
하루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잔뜩 나른한 얼굴로 얌전히 품에 안겨있던 딕이 브루스의 탄탄한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쭉 밀어내더니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였다면 살짝 숙인 목 줄기를 따라 긴 머리가 출렁하고 쏟아져 내릴법한 모습이었다. 약간 허리를 굽히고 침대에 올라앉은 딕이 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잔뜩 갈라져서 쇳소리가 섞이는 목소리가 조용 조용 이불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잖아요. 동생들 교육에 나쁘니까.”
“그게 무슨.”
“어차피 알게 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란 거죠. 제이슨도, 팀도. 그리고 데미안도.”
“…….”
“특히 데미안 말이에요. 아직 너무 어리니까 이런 거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물론 내가 숨기고 싶다거나 몰래 하자거나 그런 말이 아닌 건 알죠?”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딕의 강력한 주장은 굽힐 줄 몰랐다. 사실 다 알고 있지 않겠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답 대신 잠자코 손목을 끌어당기면 가늘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안겨오곤 했다.빛이 닿으면 푸르게 빛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맨살에 닿아왔다.
“난 언제나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과 이 약속이 연관이 있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그런걸요. 난 브루스를 좋아하지만 동생들도 좋아하니까. 아, 알프레드도 말이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이 없으면 이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적당히 예의를 갖춰서 대하는 것 뿐 이죠.”
“너무 그들에게 날을 세우진 말거라.”
“브루스는 당연한 말을 언제나 어렵게 하곤 하더라고요. 당연히 내 감정과 공적인 일은 별개니까.”
“그러냐.”
“물론이에요.”
“…….”
언제나처럼 한참동안 작은 새를 품안에 안고 브루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킬킬 웃으면서 몇 번 버둥거리던 몸이 어느새 얌전해지면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기묘하게 뒤틀린 저택은 용케 무너지지 않은 채 그렇게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있었다.
***
Ⅱ. Diurne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빛을 잔뜩 받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 푸르게 빛나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남자가 어딘가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좋을 대로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남자는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좀 더 몸을 당겨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잠시 입을 다물고 해야 할 말을 골라 보았다.
“브루스는 언제쯤 돌아오려고 그러지.”
딱히 들어줄 사람도 대답을 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가 그대로 허리에 힘을 쭉 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가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다 팀에게 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브루스가 돌아올 때 까지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팀은 어느새 사라졌다. 언제부터 집에 없었는지 온기하나 없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텅 빈 방을 바라보던 딕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가장 든든한 버팀목인 브루스가 없을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타휴먼들 사이에 껴있는 인간이란 이유만으로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이 있었다. 배트맨 일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팀은 요즘 들어 딕의 말을 한 번씩 어기곤 했었다. 물론 완전 엇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생과 집을 두고 팀을 찾으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팀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문에 작게 노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린 아이가 자기엔 너무 큰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불에 푹 파묻힌 채 자고 있는 막내 동생을 바라보다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품 안에 안아들었다. 따뜻한 이불이 사라지자 조금 추운지 품 안으로 파고드는 동생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도대체 어쩌면 좋지.’
브루스가 로드 일로 집을 비우면 온 집안은 건사하는 것은 딕의 몫이었다. 항상 집 안엔 유능한 집사인 알프레드가 붙어있긴 했지만 그가 배트맨의 대리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동생들을 한품 가득 끌어안은 딕은 막 알을 깬 어미 새 마냥 둥지에 웅크린 채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잔뜩 잠에 취한 데미안은 안아들고 원래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왔다. 좀 더 침대에서 재워도 될 일이지만 품 안에 두고 있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언제나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의 머리부터 어깨를 지나 온몸에 길게 내려앉은 짙은 회색 망토 끝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발에 감겨있었다. 의자 팔걸이에 가볍게 올려둔 두 팔은 힘조차 들어가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제이슨 잘 잤어?”
“…….”
“잘 잤다는 뜻이겠지.”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네고 딕이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높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
도저히 오늘 내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활짝 열렸다. 옆으로 비켜선 경비병들이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로드는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방에선 발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나이트 윙을 향해 곧게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러왔다. 방 한가운데 까지 걸어들어오고 나서야 열려있던 방문이 다시 닫혔다.
이제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맹수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였다. 로드의 가슴께에 두고 있던 푸른 시선이 가늘게 웃음에 녹아내렸다. 그리곤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빙글 돌아선 늘씬한 몸을 따라 망토가 긴 궤적을 그리며 따라붙었다. 온 몸에 감기는 긴 망토를 가볍게 정리했다. 그리곤 한 쪽 끝을 감아쥐고 다른 손은 등 뒤로 옮기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이트 윙. 로드를 뵙습니다.”
“…….”
“외람 된 말이오나, 배트맨이 집을 떠나 있어 대리를 맡은 제가 대신 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낮은 한마디에 푹 숙인 채 보이지 않는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으니 들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배트맨의 대리가 아닌 나이트 윙으로 날 불러들인 사람이 누군데.’
로드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호랑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으르렁거림을 듣는 것 마냥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푹 숙인 머리가 닿을 듯 가까이 온 로드가 나이트 윙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손이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안면근육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정도는 귀엽게 보아 넘어가기로 했다.
“인사는 그쯤 하지.”
“네.”
그제야 한껏 굽히고 있던 허리가 곧게 펴졌다. 가볍게 한 번 더 목례를 한 나이트 윙이 가늘게 미소를 띠며 로드를 쳐다보았다. 가늘게 휘어진 눈가에 맺힌 푸른 시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혹시 배트맨이 할 일이 생긴 건가요? 배트맨이 떠나기 전에 제게 대리를 맡기며 그다지 할 일이 없을 거라 들었긴 합니다만.”
“글쎄.”
“…로드?”
“내가 분명 배트맨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로드의 입에 데미안이 오르내리자 날카롭게 변하는 눈매를 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쳐다보는 로드는 팔짱을 낀 채 나이트 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침실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두껍고 어두운 천으로 만든 커튼은 밖에 들어오는 빛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두 장의 커튼이 맞닿은 틈 사이로 간신히 스며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침대에 길게 줄을 그으며 뻗어나갔다.
“으응.”
“…….”
“브루스. 답답해요.”
끈적끈적 늘어지는 목소리가 베개에 묻혀 사라졌다. 푹신한 베개에 잔뜩 얼굴을 묻고 자고 있던 인영이 끙끙거리고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뒤척거림이 조금 거칠어지자 이불사이에서 발끝이 보였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발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다 이내 어둠 속에 녹아내렸다. 두 쌍의 발 중 조금 작은 쪽이 탄탄한 종아리에 붙어오다 이내 이불 안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깜박깜박.
잔뜩 졸음이 붙은 눈이 느리게 움직이다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곤 몸을 조금 웅크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막 잠이 깬 손이 느릿하게 팔뚝을 더듬으며 틈을 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 안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딕이 결국 브루스를 불렀다. 약간 잠긴 목소리가 귀에 감기자 브루스가 살짝 한쪽 눈을 뜨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을 쳐다보았다.
“좀 놔주지 않을래요?”
“…….”
“이렇게 있으면 내가 얼굴을 볼 수 없잖아요.”
“…….”
“아직 자는 거 아니죠?”
“…….”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을 이리저리 밀어보다 살며시 포기한 채 몸을 몇 번 비틀어서 빙글 돌아누웠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구겨졌다. 맨발이 밀어내는 시트는 발끝을 중심으로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여전히 허리에 감긴 탄탄한 손목을 손끝으로 톡톡 건들이곤 했다. 이내 손가락이 팔을 따라 올라가고 가슴부근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손가락에 걸리는 자잘한 상처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우뚝 멎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길은 잔뜩 시달린 허리에 알싸한 통증을 선사했다. 딕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가 싶다니 동그랗게 잘생긴 이마가 브루스의 가슴께에 닿았다. 약하게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 마다 어젯밤 기억을 가득 담은 달달한 숨이 훅 내려앉았다. 살 냄새와 숨소리, 그리고 가라앉은 청년의 목소리가 안데 뒤섞인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아닌 듯 했다.
“도대체 언제 돌아올 거죠?”
“…….”
“며칠 동안이라고만 말해줬지, 다른 말은 없었잖아요. 제대로 말을 못할 정도로 오래 걸리나요?”
“그렇진 않겠지.”
“또 로드의 변덕이신가보네요.”
“…딕.”
“침대에서 하는 사적인 말은 새어나가면 안 될 텐데 말이죠.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
제법 맹랑한 농담을 던지던 딕이 허리 뒤로 감긴 브루스의 손을 풀어냈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등허리를 느긋하게 쓸어 올리는 손길에 잠시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았지만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다.
배트맨이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좀 무리를 했더니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울리고 하반신이 욱신거렸다. 분명 며칠 동안 고생할 것이 뻔했다. 집요할 정도로 온몸에 내려앉은 흔적을 바라보던 딕이 손가락 끝으로 쇄골 바로 위를 꾹 눌렀다.
“브루스, 나 먼저 일어나요?”
대답이 채 들리기도 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침대를 쑥 빠져나왔다. 푸른 시선이 등에 닿을 때 마다 몸 안쪽부터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더니 이내 허리를 살짝 굽혀 발밑에 구겨진 유니폼을 주워들었다. 늘씬하게 빠진 허리부터 예쁜 근육이 박혀서 만들어진 몸에 희미한 달빛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실루엣을 선사했다. 탄탄한 허리부터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까지 쭉 훑어 내리던 시선은 나른하게 발목께에 머물렀다. 툭 튀어나온 복사뼈를 지나면 두껍게 깔린 카펫을 밟고선 발이 보였다.
“이걸 이렇게 마구잡이로 찢어버리면 뭘 입으란 거죠? 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
“사실 찢어도 상관없지만. 혹시 화난 거 아니죠?”
“…….”
“아, 재미없어라.”
여전히 브루스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딕 또한 딱히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어 조금이라도 대화를 통해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브루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딕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팔을 위로 쭉 뻗어 크게 기지개를 펴자 예쁜 근육이 고르게 박힌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허벅지 근육이 쭉 당겨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며칠은 허리가 아플 거 같아요. 안 그래요?”
“…….”
“정말 한마디도 안할 생각이에요?”
“그런가.”
“물론이죠. 지금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 해서 내 허리가 괜찮은 것은 아닐 테니까.”
두 손 가득 들어 올린 유니폼은 반쯤 찢어져 도저히 다시 입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만히 옷을 바라보다 휙 던져버렸다. 미끈한 다리를 움직여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듯 문을 열자 같은 디자인의 옷이 빼곡하게 걸려있었다. 연신 재잘재잘 떠들던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매끈한 몸의 라인을 그대로 보여주는 딱 달라붙는 옷을 다 입고 나서야 간신히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휘휘 돌려서 망토를 찾던 딕이 침대 밑에 버려지듯 떨어진 것을 찾아냈다. 흰 망토와 푸른 어깨 장식. 항상 걸쳐 입을 때마다 유난히 무게가 더해지는 것 같은 망토와 장식이었다.
“…….”
제법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장식은 푸르게 빛났다. 잘그락 잘그락 한참동안 쇠붙이가 맞닿는 소리가 나더니 망토가 등 뒤로 길게 늘어졌다. 겉과 속의 색깔이 다른 망토를 가볍게 한손으로 말아 쥔 딕이 침대 곁으로 걸어와 냉큼 걸터앉았다. 딕이 손으로 매트리스를 누르며 허리를 쭉 빼자 무게를 그대로 받은 침대가 매끈한 스프링소리를 내곤 했다.
어지간하면 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배트맨의 고집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한 딕이 브루스의 입술을 부드럽게 탐하다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살 쓸어보곤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다 손목이 잡힌 채 뒤로 넘어갔다.
“재미없어요.”
“…….”
“농담이에요. 최대한 일찍 돌아와 줘요. 이 저택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너무 넓어서 기분이 이상하니까.”
“그렇게 하마.”
“동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지킬 거니까.”
“그래.”
“키스 안 해줄 건가요? 며칠 동안 못 볼 거 같은데? 아니면 내가 다시 할까요?”
“…….”
뒤로 넘어진 그대로 종알종알 떠드는 딕의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느릿하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가는 침실엔 가쁜 숨이 섞여들었다. 이불을 꽉 잡은 손에 힘이 풀어질 때 까지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탐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딕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힘이 다 빠진 채 브루스의 배를 베고 누운 채 늘어져서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럼 나 먼저 나가요?”
“…….”
“조금 있다 봐요.”
침대에 누워있느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쓸어넘긴 딕이 단단하게 잠긴 문을 열었다.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만 열고 날쌔게 문을 빠져나갔다. 브루스는 그런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지켜야 하는 딕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침실에서 나가는 것은 시간차를 잠자코 따라주며 아무것도 아닌 척 포장하는 장단에 슬슬 맞춰주곤 했다. 사실 브루스에겐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절대적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딕이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루스와 함께 있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손아래 동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유달리 못 견뎌했다.
하루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잔뜩 나른한 얼굴로 얌전히 품에 안겨있던 딕이 브루스의 탄탄한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쭉 밀어내더니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였다면 살짝 숙인 목 줄기를 따라 긴 머리가 출렁하고 쏟아져 내릴법한 모습이었다. 약간 허리를 굽히고 침대에 올라앉은 딕이 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잔뜩 갈라져서 쇳소리가 섞이는 목소리가 조용 조용 이불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잖아요. 동생들 교육에 나쁘니까.”
“그게 무슨.”
“어차피 알게 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란 거죠. 제이슨도, 팀도. 그리고 데미안도.”
“…….”
“특히 데미안 말이에요. 아직 너무 어리니까 이런 거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물론 내가 숨기고 싶다거나 몰래 하자거나 그런 말이 아닌 건 알죠?”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딕의 강력한 주장은 굽힐 줄 몰랐다. 사실 다 알고 있지 않겠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답 대신 잠자코 손목을 끌어당기면 가늘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안겨오곤 했다. 빛이 닿으면 푸르게 빛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맨살에 닿아왔다.
“난 언제나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과 이 약속이 연관이 있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그런걸요. 난 브루스를 좋아하지만 동생들도 좋아하니까. 아, 알프레드도 말이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이 없으면 이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적당히 예의를 갖춰서 대하는 것 뿐 이죠.”
“너무 그들에게 날을 세우진 말거라.”
“브루스는 당연한 말을 언제나 어렵게 하곤 하더라고요. 당연히 내 감정과 공적인 일은 별개니까.”
“그러냐.”
“물론이에요.”
“…….”
언제나처럼 한참동안 작은 새를 품안에 안고 브루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킬킬 웃으면서 몇 번 버둥거리던 몸이 어느새 얌전해지면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기묘하게 뒤틀린 저택은 용케 무너지지 않은 채 그렇게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있었다.
***
Ⅱ. Diurne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빛을 잔뜩 받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 푸르게 빛나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남자가 어딘가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좋을 대로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남자는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좀 더 몸을 당겨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잠시 입을 다물고 해야 할 말을 골라 보았다.
“브루스는 언제쯤 돌아오려고 그러지.”
딱히 들어줄 사람도 대답을 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가 그대로 허리에 힘을 쭉 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가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다 팀에게 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브루스가 돌아올 때 까지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팀은 어느새 사라졌다. 언제부터 집에 없었는지 온기하나 없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텅 빈 방을 바라보던 딕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가장 든든한 버팀목인 브루스가 없을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타휴먼들 사이에 껴있는 인간이란 이유만으로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이 있었다. 배트맨 일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팀은 요즘 들어 딕의 말을 한 번씩 어기곤 했었다. 물론 완전 엇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생과 집을 두고 팀을 찾으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팀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문에 작게 노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린 아이가 자기엔 너무 큰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불에 푹 파묻힌 채 자고 있는 막내 동생을 바라보다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품 안에 안아들었다. 따뜻한 이불이 사라지자 조금 추운지 품 안으로 파고드는 동생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도대체 어쩌면 좋지.’
브루스가 로드 일로 집을 비우면 온 집안은 건사하는 것은 딕의 몫이었다. 항상 집 안엔 유능한 집사인 알프레드가 붙어있긴 했지만 그가 배트맨의 대리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동생들을 한품 가득 끌어안은 딕은 막 알을 깬 어미 새 마냥 둥지에 웅크린 채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잔뜩 잠에 취한 데미안은 안아들고 원래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왔다. 좀 더 침대에서 재워도 될 일이지만 품 안에 두고 있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언제나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의 머리부터 어깨를 지나 온몸에 길게 내려앉은 짙은 회색 망토 끝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발에 감겨있었다. 의자 팔걸이에 가볍게 올려둔 두 팔은 힘조차 들어가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제이슨 잘 잤어?”
“…….”
“잘 잤다는 뜻이겠지.”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네고 딕이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높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
도저히 오늘 내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활짝 열렸다. 옆으로 비켜선 경비병들이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로드는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방에선 발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나이트 윙을 향해 곧게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러왔다. 방 한가운데 까지 걸어들어오고 나서야 열려있던 방문이 다시 닫혔다.
이제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맹수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였다. 로드의 가슴께에 두고 있던 푸른 시선이 가늘게 웃음에 녹아내렸다. 그리곤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빙글 돌아선 늘씬한 몸을 따라 망토가 긴 궤적을 그리며 따라붙었다. 온 몸에 감기는 긴 망토를 가볍게 정리했다. 그리곤 한 쪽 끝을 감아쥐고 다른 손은 등 뒤로 옮기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이트 윙. 로드를 뵙습니다.”
“…….”
“외람 된 말이오나, 배트맨이 집을 떠나 있어 대리를 맡은 제가 대신 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낮은 한마디에 푹 숙인 채 보이지 않는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으니 들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배트맨의 대리가 아닌 나이트 윙으로 날 불러들인 사람이 누군데.’
로드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호랑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으르렁거림을 듣는 것 마냥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푹 숙인 머리가 닿을 듯 가까이 온 로드가 나이트 윙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손이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안면근육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정도는 귀엽게 보아 넘어가기로 했다.
“인사는 그쯤 하지.”
“네.”
그제야 한껏 굽히고 있던 허리가 곧게 펴졌다. 가볍게 한 번 더 목례를 한 나이트 윙이 가늘게 미소를 띠며 로드를 쳐다보았다. 가늘게 휘어진 눈가에 맺힌 푸른 시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혹시 배트맨이 할 일이 생긴 건가요? 배트맨이 떠나기 전에 제게 대리를 맡기며 그다지 할 일이 없을 거라 들었긴 합니다만.”
“글쎄.”
“…로드?”
“내가 분명 배트맨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로드의 입에 데미안이 오르내리자 날카롭게 변하는 눈매를 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쳐다보는 로드는 팔짱을 낀 채 나이트 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