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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마다 가볍게 명령만 하면 충분했다.
손짓 한 번이면 어지간한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로드의 성 내에서 콘에게 안 된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콘이 직접적으로 소유욕을 드러내진 않았다. 언제나 비슷하게 재미없는 일상이었고, 그런 생활 속에서 딱히 무엇인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재미없어.’
흔한 장난감 하나 마련되지 않은 방에서 콘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는 일 정도였다. 로드가 실권을 쥐고 있는 성에서 콘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약간의 필요한 공부와 사찰이 끝나면 어디를 돌아다니던 그다지 제약을 받지 않았다. 하루는 온종일 침대에 누워있기도 했고, 다음날은 하늘에 떠서 해가 가장 높은 곳에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대지에 길게 빛을 늘어뜨리면 온몸 가득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치 피가 흥건히 젖어든 것 같은 착각이 들면 온몸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를 쳐다보고 온 날은 꼭 꿈을 꾸었다. 제대로 된 사물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의 꿈을 꾸었다. 새빨간 불처럼 일렁거리다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콘은 언제나 혼자였다. 축축 발목에 감기는 의식을 걷어내면서 한없이 걸었다. 두 손에 척척 감기는 그림자를 억지로 뜯어내면 피처럼 빨간 자국이 덕지덕지 남았다. 한참동안 꿈에서 깨지 못하다 간신히 눈을 뜨면 새벽이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가슴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부옇게 흐린 안개 너머로 천천히 해가 밝아왔다.
재미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
그렇게 재미없는 삶을 살던 콘에게 어느 순간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처음 만난 것은 로드를 만나러 온 배트맨의 뒷자락에서였다. 사실 콘은 배트맨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배트맨이 가끔 로드의 성으로 들어오는 날엔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굳이 자신의 손님도 아닌 배트맨을 나서서맞이해야 할 이유가 없다 생각했다. 게다가 성안의 그 누구도 콘의 생각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날도 일찌감치 밖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계속 누군가와 부딪히면서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보통 때면 당장 화를 냈겠지만,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겨우 밖으로 나가는 문 가까이 갔을 때, 누군가 도착한 것을 알았다.
“…….”
자신이 명령을 하지 않았는데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양쪽으로 무겁게 열리는 성문 가운데 배트맨이 서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부딪혀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런 콘을 잠시 바라보던 배트맨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항상 입고 다니는 긴 회색망토가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카울 안에 감춰진 얼굴은 언제나 변화가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신가? 천하의 배트맨이 몸소 로드의 성 안으로 들어오고.’
길게 이어지는 망토를 바라보던 콘의 눈에 낯선 옷자락이 들어왔다.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과 다른 검은 망토가 배트맨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가끔 배트맨이 데리고 오는 나이트윙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라면 분명 하얀 망토를 걸치고 있어야 했다.
‘…누구지?’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눈을 가늘게 뜨며 한참동안 바라봤지만, 긴 망토를 두른 채 목덜미를 길게 덮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배트맨을 따라 저 멀리 복도 안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을 쯤 되어서야 콘은 가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트맨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성으로 돌아갔다. 언제나처럼 가볍게 땅에 내려온 콘이 손가락을 우득우득 꺾었다. 딱히 성문으로 들어갈만한 것도 아니었기에 다시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찌를 듯 높은 담장을 가볍게 넘어 테라스에 닿았다. 콘의 취향은 아닌 곳이었다. 화려한 꽃이 잔뜩 피고, 깔끔하게 관리된 테라스는 누가 봐도 로드의 성에 어울리지 않았다.
꽤 풍성하게 자라 손끝에 스치는 장미를 한 송이 꺾어 들었다. 너무나 섬세한 꽃잎을 가진 장미는 꺾기위해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와작 우그러져 제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손을 들어 툭툭 털어버리자 우그러진 붉은 꽃잎이 발아래 하나 둘 떨어졌다. 콘은 약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치는 것도 별로였다. 몇 번 더 꽃을 꺾어보려 했지만 번번이 우그러지자 금방 싫증을 냈다.
테라스에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아까 봤던 낯선 사람에 대해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딱히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에서 뒤척거리다 설핏 잠이 들었다. 시계 소리를 포함한 흔한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은 그대로 멈춰있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콘이 돌아누울 때마다 사박사박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콘이 눈을 뜨기 전까지 방안엔 숨소리만 사분사분 내려앉곤 했다.
***
배트맨은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저스티스 로드에 속해있으면서도, 언제라도 로드에게서 등을 돌릴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곤 했다. 콘은 로드를 만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인간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 하곤 했지만, 번번이 말끝을 잘린 채 입을 다물어야했다. 로드는 콘을 꽤 편하게 풀어주곤 했지만, 일정한 규칙을 어기면 불같이 화를 냈다. 로드가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콘은 입을 다문 채 억지로 불만을 삼켜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뭐라고 해도 배트맨은 저스티르 로드 소속이었다. 게다가 로드 숲 바로 아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인간이지만 아무나 함부로 대할 만한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 불문율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콘도 마찬가지였다. 콘은 로드의 후계자였지만, 아직 저스티스 로드에 속한 사람들을 비판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배트맨은 슬하에 친자 하나와 양자 셋을 두었다 했는데, 그 아들도 아비를 보고 자랐는지 언제나 로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곤 했다. 그나마 넷 중에 로드에 속해있는 나이트윙이 언제나 중간에 서서 중재를 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로드 멤버를 봤고, 또 익숙했다.
하지만 배트맨이 로드에게 내보이는 사람은 나이트윙이 전부였다. 그렇게 배트맨과 나이트윙의 보호아래에서 자란 아이들 중 팀은 유난히 경계가 심했다. 아니 경계가 심하다고 말하는 것보단 딱히 로드 쪽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배트맨 아래에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을 찾아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고 말했다. 배트맨은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아들을 감싸고도는 것인지 좀처럼 집밖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팀이라고 했던가.’
계속 저번에 봤던 모습이 눈에 떨어지지 않아 수문장과 시종들을 다그쳐 알아낸 이름이었다. 팀. 팀 드레이크. 팀 드레이크 웨인. 입안에서 몇 번이나 툭툭 걸리면서 지나가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어보았다. 어쩐지 그 이름이 뒷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시 만나면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그날 이후 팀은 로드의 성에 출입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연구 할 것이 있다거나 배트맨 쪽 일로 다른 곳에 출장 중이라는 교묘한 이유를 대면서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보면서 과하게 몰입하는 쪽은 콘이었다. 이렇게 계속 시선을 끄는 일은 처음이었다. 항상 재미없고 똑같이 흘러가던 하루에 조금 다른 조각이 끼어들었다. 그 조각은 생각 외로 단단하고 뾰족해서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언젠간 꼭 저 검은 망토를 손수 벗겨내고 하얀 색을 덮어씌워 주리라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그러했을 뿐 여전히 팀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시간만 하염없이 보내고 있었다. 콘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할수록 귀찮아지는 쪽은 팀이었다.
결국 로드의 명령에 못 이겨 몇 번 성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딱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하필 배트맨과 나이트윙이 동시에 자리를 비웠을 때인 이유도 있었다. 자신 말고 성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다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성을 찾았다.
몇 겹이나 되는 무거운 문을 지났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의 문이 안쪽으로 열리면 그 앞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열 걸음 정도 걸은 후 잠시 기다리면 두 번째 문이 열렸다. 몇 번이나 걸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간결한 장식이 드문드문 붙어있는 긴 복도를 지나고 몇 번이나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성 안쪽으로 걸어들어가고도 모자라 조금 더 들어간 곳에 접견실이 있었다. 문이 열릴 때 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대리석이 틈 하나 없이 맞닿아 넓은 바닥을 만들었다. 가만 내려다보면 흐릿하게 인영이 맺히곤 했다. 붉은 양탄자를 가볍게 밟으며 로드 앞으로 걸어갔다. 한쪽 손을 가볍게 가슴에 올리고, 반대쪽 팔을 곧게 펴 망토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 허리를 숙였다.
“로드께 인사를 올립니다.”
“…….”
“마침 집안에 아무도 없어 부득이하게 제가 성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혹여 따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배트맨과 나이트윙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
가볍에 턱으로 서류를 건네줄 사람을 지목했다. 팀은 그럼 행동에 토를 달지도, 의문을 가지지도 않은 채 가늘게 웃었다. 영악한 아이는 이런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로드.”
“…….”
“알겠습니다.”
사실 들어올 필요가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할 대답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나이트윙도 아니고, 로드에 제대로 속해있지도 않은 아이에게 로드가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류를 가까이 서있는 시종에게 넘기고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다시 허리를 들어 로드를 잠시 바라보곤 그대로 돌아섰다. 어깨를 감싸며 흘러내린 검은 망토가 접견실을 벗어나고, 묵직한 문이 닫힐 때까지 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럴 거면 왜 급하게 불러들였던 거야.”
차마 로드 앞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성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게 내려앉아서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나마 바깥으로 향한 복도를 돌아 들어가면 아치형으로 뚫린 창으로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은 숨만 턱턱 막혀왔다. 빨리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재촉하는데 누군가 팀의 앞을 막아섰다.
“…….”
걸음을 급하게 멈춘 팀이 약간 아래를 바라보던 시선으로 누군가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길을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저…….”
“…….”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파란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채 가려지지 않은 욕망의 눈길을 팀이 모를 리 없었다. 생각보다 조금 덜 자란 아이와 너무 빨리 자란 아이가 서로 마주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팀이었다.
“팀 드레이크. 로드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
“그럼 이만.”
로드에게 하는 것처럼 가볍게 목례를 하고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어깨를 덥석 잡은 손이 그대로 팀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부딪힌 몸이 고통에 바르작거렸다. 잔뜩 찌푸린 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지며 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단하게 잡힌 어깨는 콘이 힘을 쥘수록 부서질 듯 아파왔다. 팀은 간신히 두 손을 움직여 콘의 팔뚝을 잡고 밀어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저…….”
“…….”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어깨를 부서질 듯 쥐던 콘은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갈수록 어깨에 하나 둘 피멍이 내려앉았다. 바닥에서 한 뼘 정도 들려 올라간 다리는 축 처진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하더라도 함부로 반항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참고 나서야 콘이 점차 흥분을 가라앉혔다. 두 손을 놔주자 날씬하게 뻗은 몸이 벽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허억…헉.”
“왜…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지?”
“…….”
“내가 물었다. 팀 드레이크.”
“왜냐면 굳이 당신과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드의 후계자시여.”
“…….”
“전 아직 로드에 속하지 않았으니…사적인 만남을 가질 이유도 이런 불합리한 명령을 따를 이유도 없습니다.”
“…….”
“부디…저와 만남이 필요하시다면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주시길…부탁드립니다.”
“…….”
어깨를 감싸 쥔 팀이 고통이 섞인 긴 신음소리를 바닥에 흘려보내고 나서야 천천히 질문에 대답했다. 고통에 못 이겨 잔뜩 식은땀이 배어나온 이마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하나둘 붙어있었다. 목소리는 아픔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한없이 차분했다. 또박또박 콘의 물음에 한마디 한마디지지 않는 입은 가늘게 꼬리를 올린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약간 긴 머리가 잔뜩 젖은 턱 선을 따라 붙어댔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흐릿한 미소에 콘은 다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럼 로드에 속하게 되면 날 봐줄 수 있나?”
“글쎄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습니다만, 제가 로드에 들어올 확률은 극히 낮은 것 같습니다.”
“…….”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그럼.”
왼쪽 어깨를 감싸 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난 팀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을 빠져 나갔다. 그날 처음으로 팀의 얼굴을 봤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서 시선을 올려 콘을 바라보았다. 쨍할 정도로 파란 시선은 날카롭고 곧게 뻗어있었다. 로드의 후계자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팀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큰일 날 뻔 했네.’
팀은 잔뜩 긴장한 어깨를 부르르 떨며 급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로드의 후계자인 콘-엘의 성격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콘은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로드를 만나는 것보다 더 정신력을 소모하곤 했다. 그렇기에 굳이 콘과 연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세상은 팀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러려고 한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인생이 조금 귀찮아질 것 같았다. 어지간히 눈치가 빠른 터라 콘의 눈에서 타오르는 소유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해 그것만을 바라보는 어린애와 같은 눈빛이었다. 콘의 시선은 언제나 팀을 향하고 있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 왜 이리도 한 사람에게 집착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총애가 깊어져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면야 몇 번이고 그 욕망을 받아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몸 한 번 내주는 것이 그리 어렵겠냐만, 확실한 약조도 미래에 대한 보상도 없는 곳에 굳이 걸어들어 갈 이유는 없었다.
“…윽.”
무심코 팔에 힘을 주었는지 어깨가 빠질 듯 아파왔다. 분명 옷을 벗으면 시뻘건 손자국이 온몸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왈칵 기분이 나빠졌다. 잠시라도 이 성에 남아있지 싫은 팀은 급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뒤 성을 빠져나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
그렇게 팀을 보내고 콘은 자신의 방에 돌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던 콘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에 왈칵 눈을 찌푸렸다. 간질간질 심장을 간질이다가 어느새 머릿속에 숨어든 기묘한 느낌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몸 가장 깊은 곳에서 계속 돌아다니면서 콘을 괴롭히고 있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 솟구치자 짜증이 났다. 옆으로 휘두른 주먹에 맞은 벽이 쩍쩍 금이 갔다. 아무리 몸으로 짜증을 표현해도 가시지 않았다. 넓은 가슴 속에 또아리를 틀고 답답하게 들어앉은 것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장을 옥죄며 단단하게 뭉쳐졌다. 숨을 쉬기 불편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줬고, 점점 제대로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왜 이러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배운 학문 중에선 비슷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학자들과 선생은 콘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줬지만, 그 지식으로는 이번 일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배운 기억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럴수록 심장은 점점 더 답답해져 갔다.
로드는 자신의 후계자인 콘이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콘이 스스로 원해서 섞인 유전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포함된 것을 긁어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적어도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그 것을 최대한 억누르고 크립토니안에 가까워지길 주문했다. 콘도 그런 명령에 그다지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인간을 버리려 했기에 그렇게 많은 감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불편하진 않았다.
결국 몇 번이나 생각을 하고, 그에 따른 답답함이 분노로 표출되었다. 참는 것보다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늘 그래왔었다.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방을 거의 부수게 될 무렵 어렴풋 깨달을 수 있었다.
‘아…내가 그 녀석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건가.’
시릴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두 눈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원하는 눈빛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을 위한 선물을 원하는 얼굴은 그 다음 일어날 상황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손에 원하는 것이 들어오면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어째서 팀 드레이크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뒷모습을 한번 봤고, 오늘 얼굴을 겨우 마주했을 뿐이었다. 그 전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이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두 손목을 잡아 누르고 배트맨의 상징인 검은 망토를 찢어버릴 것이다. 배트맨을 도와주는 울새였지만, 그 정도로 콘을 막을 순 없었다. 그녀석이 로빈이라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몸에 직접 하얀 망토를 둘러준 후 이 성에 영원히 박제할 생각이었다.
“…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가에 날카로운 웃음이 흘렀다. 손에 깍지를 끼고 이마를 댄 채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콘이 웃기 시작했다. 작게 흐느끼듯 웃던 웃음은 점점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즐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무료했던 일상에 작은 기쁨이 돋았을 때 콘은 좀처럼 흥분은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