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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했습니다 책 나와요 >:3c 케이크 스퀘어용 수량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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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Dawn
“…브루스?”
“…….”
“브루스. 일어났어요?”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침실에서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두껍고 어두운 천으로 만든 커튼은 밖에 들어오는 빛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두 장의 커튼이 맞닿은 틈 사이로 간신히 스며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침대에 길게 줄을 그으며 뻗어나갔다.
“으응.”
“…….”
“브루스. 답답해요.”
끈적끈적 늘어지는 목소리가 베개에 묻혀 사라졌다. 푹신한 베개에 잔뜩 얼굴을 묻고 자고 있던 인영이 끙끙거리고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뒤척거림이 조금 거칠어지자 이불사이에서 발끝이 보였다. 희미한 달빛을 받은 발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다 이내 어둠 속에 녹아내렸다. 두 쌍의 발 중 조금 작은 쪽이 탄탄한 종아리에 붙어오다 이내 이불 안 쪽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깜박깜박.
잔뜩 졸음이 붙은 눈이 느리게 움직이다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곤 몸을 조금 웅크려 아래를 바라보았다. 막 잠이 깬 손이 느릿하게 팔뚝을 더듬으며 틈을 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목 안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던 딕이 결국 브루스를 불렀다. 약간 잠긴 목소리가 귀에 감기자 브루스가 살짝 한쪽 눈을 뜨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목을 쳐다보았다.
“좀 놔주지 않을래요?”
“…….”
“이렇게 있으면 내가 얼굴을 볼 수 없잖아요.”
“…….”
“아직 자는 거 아니죠?”
“…….”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을 이리저리 밀어보다 살며시 포기한 채 몸을 몇 번 비틀어서 빙글 돌아누웠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구겨졌다. 맨발이 밀어내는 시트는 발끝을 중심으로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여전히 허리에 감긴 탄탄한 손목을 손끝으로 톡톡 건들이곤 했다. 이내 손가락이 팔을 따라 올라가고 가슴부근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손가락에 걸리는 자잘한 상처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우뚝 멎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길은 잔뜩 시달린 허리에 알싸한 통증을 선사했다. 딕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가 싶다니 동그랗게 잘생긴 이마가 브루스의 가슴께에 닿았다. 약하게 가슴이 부풀어 오를 때 마다 어젯밤 기억을 가득 담은 달달한 숨이 훅 내려앉았다. 살 냄새와 숨소리, 그리고 가라앉은 청년의 목소리가 안데 뒤섞인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는 곳이 아닌 듯 했다.
“도대체 언제 돌아올 거죠?”
“…….”
“며칠 동안이라고만 말해줬지, 다른 말은 없었잖아요. 제대로 말을 못할 정도로 오래 걸리나요?”
“그렇진 않겠지.”
“또 로드의 변덕이신가보네요.”
“…딕.”
“침대에서 하는 사적인 말은 새어나가면 안 될 텐데 말이죠. 그만 일어나야겠어요.”
“…….”
제법 맹랑한 농담을 던지던 딕이 허리 뒤로 감긴 브루스의 손을 풀어냈다.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등허리를 느긋하게 쓸어 올리는 손길에 잠시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았지만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순 없었다.
배트맨이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좀 무리를 했더니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울리고 하반신이 욱신거렸다. 분명 며칠 동안 고생할 것이 뻔했다. 집요할 정도로 온몸에 내려앉은 흔적을 바라보던 딕이 손가락 끝으로 쇄골 바로 위를 꾹 눌렀다.
“브루스, 나 먼저 일어나요?”
대답이 채 들리기도 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침대를 쑥 빠져나왔다. 푸른 시선이 등에 닿을 때 마다 몸 안쪽부터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더니 이내 허리를 살짝 굽혀 발밑에 구겨진 유니폼을 주워들었다. 늘씬하게 빠진 허리부터 예쁜 근육이 박혀서 만들어진 몸에 희미한 달빛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실루엣을 선사했다. 탄탄한 허리부터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까지 쭉 훑어 내리던 시선은 나른하게 발목께에 머물렀다. 툭 튀어나온 복사뼈를 지나면 두껍게 깔린 카펫을 밟고선 발이 보였다.
“이걸 이렇게 마구잡이로 찢어버리면 뭘 입으란 거죠? 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
“사실 찢어도 상관없지만. 혹시 화난 거 아니죠?”
“…….”
“아, 재미없어라.”
여전히 브루스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딕 또한 딱히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침대 밖으로 빠져나오자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어 조금이라도 대화를 통해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브루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딕의 말을 들을 뿐이었다. 팔을 위로 쭉 뻗어 크게 기지개를 펴자 예쁜 근육이 고르게 박힌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허벅지 근육이 쭉 당겨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며칠은 허리가 아플 거 같아요. 안 그래요?”
“…….”
“정말 한마디도 안할 생각이에요?”
“그런가.”
“물론이죠. 지금 멀쩡하게 걸어 다닌다 해서 내 허리가 괜찮은 것은 아닐 테니까.”
두 손 가득 들어 올린 유니폼은 반쯤 찢어져 도저히 다시 입을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만히 옷을 바라보다 휙 던져버렸다. 미끈한 다리를 움직여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익숙한 듯 문을 열자 같은 디자인의 옷이 빼곡하게 걸려있었다. 연신 재잘재잘 떠들던 입은 여전히 쉬지 않았다. 매끈한 몸의 라인을 그대로 보여주는 딱 달라붙는 옷을 다 입고 나서야 간신히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휘휘 돌려서 망토를 찾던 딕이 침대 밑에 버려지듯 떨어진 것을 찾아냈다. 흰 망토와 푸른 어깨 장식. 항상 걸쳐 입을 때마다 유난히 무게가 더해지는 것 같은 망토와 장식이었다.
“…….”
제법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장식은 푸르게 빛났다. 잘그락 잘그락 한참동안 쇠붙이가 맞닿는 소리가 나더니 망토가 등 뒤로 길게 늘어졌다. 겉과 속의 색깔이 다른 망토를 가볍게 한손으로 말아 쥔 딕이 침대 곁으로 걸어와 냉큼 걸터앉았다. 딕이 손으로 매트리스를 누르며 허리를 쭉 빼자 무게를 그대로 받은 침대가 매끈한 스프링소리를 내곤 했다.
어지간하면 밖으로 출입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배트맨의 고집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한 딕이 브루스의 입술을 부드럽게 탐하다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살 쓸어보곤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다 손목이 잡힌 채 뒤로 넘어갔다.
“재미없어요.”
“…….”
“농담이에요. 최대한 일찍 돌아와 줘요. 이 저택은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너무 넓어서 기분이 이상하니까.”
“그렇게 하마.”
“동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지킬 거니까.”
“그래.”
“키스 안 해줄 건가요? 며칠 동안 못 볼 거 같은데? 아니면 내가 다시 할까요?”
“…….”
뒤로 넘어진 그대로 종알종알 떠드는 딕의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느릿하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가는 침실엔 가쁜 숨이 섞여들었다. 이불을 꽉 잡은 손에 힘이 풀어질 때 까지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탐하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딕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힘이 다 빠진 채 브루스의 배를 베고 누운 채 늘어져서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럼 나 먼저 나가요?”
“…….”
“조금 있다 봐요.”
침대에 누워있느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쓸어넘긴 딕이 단단하게 잠긴 문을 열었다.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만 열고 날쌔게 문을 빠져나갔다. 브루스는 그런 행동이 그다지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고 말을 하진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지켜야 하는 딕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침실에서 나가는 것은 시간차를 잠자코 따라주며 아무것도 아닌 척 포장하는 장단에 슬슬 맞춰주곤 했다. 사실 브루스에겐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절대적은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딕이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루스와 함께 있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손아래 동생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유달리 못 견뎌했다.
하루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전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잔뜩 나른한 얼굴로 얌전히 품에 안겨있던 딕이 브루스의 탄탄한 가슴에 두 손을 대고 쭉 밀어내더니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였다면 살짝 숙인 목 줄기를 따라 긴 머리가 출렁하고 쏟아져 내릴법한 모습이었다. 약간 허리를 굽히고 침대에 올라앉은 딕이 땀에 젖은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어젯밤부터 잔뜩 갈라져서 쇳소리가 섞이는 목소리가 조용 조용 이불 위에 쌓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잖아요. 동생들 교육에 나쁘니까.”
“그게 무슨.”
“어차피 알게 될 것 같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란 거죠. 제이슨도, 팀도. 그리고 데미안도.”
“…….”
“특히 데미안 말이에요. 아직 너무 어리니까 이런 거 보여주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물론 내가 숨기고 싶다거나 몰래 하자거나 그런 말이 아닌 건 알죠?”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딕의 강력한 주장은 굽힐 줄 몰랐다. 사실 다 알고 있지 않겠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대답 대신 잠자코 손목을 끌어당기면 가늘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안겨오곤 했다. 빛이 닿으면 푸르게 빛나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맨살에 닿아왔다.
“난 언제나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과 이 약속이 연관이 있으면 좋겠구나.”
“언제나 그런걸요. 난 브루스를 좋아하지만 동생들도 좋아하니까. 아, 알프레드도 말이죠.”
“그래.”
“다른 사람들은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그들이 없으면 이 행복이 지속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적당히 예의를 갖춰서 대하는 것 뿐 이죠.”
“너무 그들에게 날을 세우진 말거라.”
“브루스는 당연한 말을 언제나 어렵게 하곤 하더라고요. 당연히 내 감정과 공적인 일은 별개니까.”
“그러냐.”
“물론이에요.”
“…….”
언제나처럼 한참동안 작은 새를 품안에 안고 브루스가 잠깐 눈을 감았다. 킬킬 웃으면서 몇 번 버둥거리던 몸이 어느새 얌전해지면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기묘하게 뒤틀린 저택은 용케 무너지지 않은 채 그렇게 햇빛을 받으며 우뚝 솟아있었다.
***
Ⅱ. Diurne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빛을 잔뜩 받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 푸르게 빛나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던 남자가 어딘가를 보면서 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좋을 대로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남자는 그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결국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좀 더 몸을 당겨 앉았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잠시 입을 다물고 해야 할 말을 골라 보았다.
“브루스는 언제쯤 돌아오려고 그러지.”
딱히 들어줄 사람도 대답을 해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가 그대로 허리에 힘을 쭉 뺀 채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가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다 팀에게 까지 생각이 흘러갔다.
‘그렇게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브루스가 돌아올 때 까지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팀은 어느새 사라졌다. 언제부터 집에 없었는지 온기하나 없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텅 빈 방을 바라보던 딕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가장 든든한 버팀목인 브루스가 없을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메타휴먼들 사이에 껴있는 인간이란 이유만으로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이 있었다. 배트맨 일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팀은 요즘 들어 딕의 말을 한 번씩 어기곤 했었다. 물론 완전 엇나간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생과 집을 두고 팀을 찾으러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팀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문에 작게 노크를 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용히 문을 열었다. 어린 아이가 자기엔 너무 큰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불에 푹 파묻힌 채 자고 있는 막내 동생을 바라보다 이내 이불을 걷어내고 품 안에 안아들었다. 따뜻한 이불이 사라지자 조금 추운지 품 안으로 파고드는 동생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주곤 조용히 방을 나섰다.
‘도대체 어쩌면 좋지.’
브루스가 로드 일로 집을 비우면 온 집안은 건사하는 것은 딕의 몫이었다. 항상 집 안엔 유능한 집사인 알프레드가 붙어있긴 했지만 그가 배트맨의 대리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동생들을 한품 가득 끌어안은 딕은 막 알을 깬 어미 새 마냥 둥지에 웅크린 채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잔뜩 잠에 취한 데미안은 안아들고 원래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왔다. 좀 더 침대에서 재워도 될 일이지만 품 안에 두고 있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언제나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슨의 머리부터 어깨를 지나 온몸에 길게 내려앉은 짙은 회색 망토 끝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발에 감겨있었다. 의자 팔걸이에 가볍게 올려둔 두 팔은 힘조차 들어가지 않고 늘어져 있었다.
“제이슨 잘 잤어?”
“…….”
“잘 잤다는 뜻이겠지.”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네고 딕이 데미안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높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
도저히 오늘 내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활짝 열렸다. 옆으로 비켜선 경비병들이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로드는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방에선 발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나이트 윙을 향해 곧게 뚜벅뚜벅 걷는 발자국 소리가 귀를 따갑게 찔러왔다. 방 한가운데 까지 걸어들어오고 나서야 열려있던 방문이 다시 닫혔다.
이제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맹수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였다. 로드의 가슴께에 두고 있던 푸른 시선이 가늘게 웃음에 녹아내렸다. 그리곤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빙글 돌아선 늘씬한 몸을 따라 망토가 긴 궤적을 그리며 따라붙었다. 온 몸에 감기는 긴 망토를 가볍게 정리했다. 그리곤 한 쪽 끝을 감아쥐고 다른 손은 등 뒤로 옮기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나이트 윙. 로드를 뵙습니다.”
“…….”
“외람 된 말이오나, 배트맨이 집을 떠나 있어 대리를 맡은 제가 대신 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낮은 한마디에 푹 숙인 채 보이지 않는 표정이 확 구겨졌다. 아직 고개를 들지 않았으니 들키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배트맨의 대리가 아닌 나이트 윙으로 날 불러들인 사람이 누군데.’
로드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호랑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으르렁거림을 듣는 것 마냥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푹 숙인 머리가 닿을 듯 가까이 온 로드가 나이트 윙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손이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어깨와 안면근육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정도는 귀엽게 보아 넘어가기로 했다.
“인사는 그쯤 하지.”
“네.”
그제야 한껏 굽히고 있던 허리가 곧게 펴졌다. 가볍게 한 번 더 목례를 한 나이트 윙이 가늘게 미소를 띠며 로드를 쳐다보았다. 가늘게 휘어진 눈가에 맺힌 푸른 시선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절 찾으시다니 혹시 배트맨이 할 일이 생긴 건가요? 배트맨이 떠나기 전에 제게 대리를 맡기며 그다지 할 일이 없을 거라 들었긴 합니다만.”
“글쎄.”
“…로드?”
“내가 분명 배트맨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로드의 입에 데미안이 오르내리자 날카롭게 변하는 눈매를 채 숨기지 못했다. 그런 미묘한 변화를 쳐다보는 로드는 팔짱을 낀 채 나이트 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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