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평생 어쩌면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도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런 연고 없이 불쑥 앞에 나타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힘들게 입을 열어 청하는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몰차게 거절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신에게서 온 선물이라고 불리는 붉은 보랏빛 띠가 몸 어딘가에 나타날 때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일에 수긍하곤 했다. 소위 선택받았다고 하는 몇몇 사람들은 일생에 한번 쯤 이런 경험을 하곤 했다. 처음엔 희미하게 멍처럼 보이는 보라색 띠가 점점 진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면 그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일종의 낙인이었고, 초대장이었으며, 조금 로맨틱한 상상을 한다면 일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서약의 반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거 싫은데.”
별 생각 없이 쳐다본 손목에 수갑처럼 나타난 띠는 묵직하게 내려앉아있었다. 마타타기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어딘가에 속할 거란 생각을 해본 저이 없었다. 물론 냉정하게 따지자면 생활엔 충분히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연구소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발현한 미미한 형질 때문에 센티넬인지 가이드인지도 모르는 상태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센티넬과 가이드는 귀한 존재였고, 보호받아 마땅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연구소로 들어가야 한다면 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곤 했다.
‘…뭐 센티넬만 아니면 되는 거지.’
게다가 완전히 연구소에 배속되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들은 어느 정도 유연한 개인 생활을 보장받았다. 폭주할 가능성이 다분한 센티넬들과 달리 가이드들은 겉보기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센티넬을 억제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 일반인이라고 불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상생활을 하던 도중 정신이 나가거나 한 일이 없었으니 가이드가 아닐까 하고 어림잡아 짐작 할 뿐이었다.
“…그래도 역시 좀 걱정이 되는데 말이야.”
동생들을 놔두고 연구소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거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며칠 내로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하나 둘 천천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덤덤하게 새로운 곳으로 가는 초대장을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손목에 나타난 띠는 점점 진해졌다. 멍 같아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전혀 아닌 보라색 띠는 수갑을 채운 것처럼 단단하게 손목을 물어왔다.
주변을 정리하고 헤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동생들은 조금 불안해했지만, 마타타기가 걱정 말라고 하자 곧 수긍했다. 마타타기를 데려가기로 한 연구소 측에서 가족들에 대한 모든 편의를 봐주기로도 합의가 되었다. 한 달 정도 센티넬 집중 시설에 들어가 싱크로 조절을 끝내고 나면, 가이드가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난 것과 같았다. 동생들이 머무는 기숙사에도 충분히 출입할 수 있었다. 마타타기가 한발 먼저 떠난 집에서 하루를 더 보낸 동생들은 연구소 측에서 보낸 직원들의 손을 잡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 ✼ *
“도대체…이런 곳까지 사람을 불러 놓고 뭐하자는 겁니까?”
“조용히 해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뚝 끊어버리는 어른을 쳐다보던 마타타기는 금방 수긍했다.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하고 올리다 이내 표정을 죽인 채 시선을 가로막는 어깨를 노려보았다.
“예…뭐 기라면 기어야죠. 그런데 절 그렇게 원하는 센티넬은 누군가요? 난 그런데 까칠한 사람은 별론데.”
“…….”
“뭐 말하기 싫으면 마시던가요. 하여튼…어른들이란.”
뒤에서 대놓고 툴툴대는 소리를 듣는 연구소장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지만, 언짢은 헛기침을 한 번 하며 간신히 화를 내리 눌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나이에 발현한 가이드들은 센티넬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조금 멋대로 군다고 쉽게 내칠 수는 없었다. 페어끼리 훈련을 받는 독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난리법석을 느낄 수 있었다. 귀를 찌르는 소란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럽죠?”
“가이드가 제대로 붙지 않은 센티넬들에겐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
“개잡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중요한 자원인데 무슨…좀 소중하게 대해주는 편이 낫지 않아요?”
“…….”
“아 뭐, 네. 말이 좀 길었네요.”
어른들이란. 마지막 한마디 덧붙이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이중 삼중으로 단단하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지막 철문을 열고나서야 마타타기는 자신을 그렇게 불러대던 파트너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잔뜩 성이 난 들개 한 마리였다. 하얀 털을 가진 녀석은 온 방안을 제멋대로 헤집으면서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목에 묶여있는 단단한 쇠사슬 목걸이도 모자라 네 발을 구속한 가죽 족쇄가 연신 절그럭 거리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게 뭡니까?”
“센티넬이다.”
“예? 농담하지 마시고 진짜 이야기를 좀 하는 게 어떨까요? 어딜 봐도 미친 개ㅅ…아니 개인데.”
“가이드가 좀처럼 붙지 않아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로 변해 있는 거다. 네 녀석이 조금만 일찍 도착해도 이 녀석이 이럴 일은 없었을 거야.”
“그래서…덮어씌우시려고요?”
“흠. 흠.”
들어가 봐라. 등을 떠미는 힘에 못 이겨 안쪽으로 터덜터덜 걸어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씩씩거리는 호흡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던 것 같았다. 절그럭 거리는 사슬 소리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커다란 흰 물체를 내려다보던 마타타기가 한걸음 다가섰다.
“…어어. 쉿.”
“…….”
“그렇게 이를 드러내면 어쩌려고? 가만히 있어.”
목덜미에 걸린 가죽 목걸이를 잡아채는 순간 네 발의 힘이 풀린 짐승이 바닥에 스르르 쓰러졌다. 품안에 한가득 들어오고도 남은 녀석을 어설프게 끌어안은 마타타기가 도움을 청했다.
“아니 이거 뭔데요!”
“…….”
“아니 이거 좀 어떻게 해봐요!! 계약이고 뭐고 아니…아 진짜. 이게 뭔데 도대체!”
“데려가. 정식 계약서는 정신이 들면 하지.”
“좀 말 좀 해주고…아니!!”
“어서 데려가.”
품 안에서 떨어진 짐승은 곧 이동용 침대에 올라갔고, 그새 흰털이 잔뜩 붙은 옷을 털던 마타타기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많은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따로 지정받은 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벽 양쪽에 붙은 침대 중 하나에 흰 개를 던져놓은 연구원들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간단한 짐 가방 하나만 들고 들어온 마타타기는 그 옆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저 녀석이 뭐?”
“…….”
“야, 말 좀 해봐라.”
“…….”
“나도 모르겠다. 내일 되면 뭐라도 되겠지.”
막상 말을 해봐야 할 상대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기다려봤자 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몫으로 마련된 침대에 벌렁 드러눕자 낯선 매트리스가 허리에 닿았다. 더듬더듬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긴 글렀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눈이 감기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서로 다른 숨소리가 사분사분 섞여 들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누군지도 모를 녀석이 집 안에 들어앉아 나가질 않았다. 나이트윙와 로빈, 그리고 비스트 보이가 본부에 있을 때 나타났다는 녀석은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라고 했다. 시끄럽고, 산만하고 작은 녀석은 빠르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면서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영 저스티스로 굴러들어온 임펄스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나이트윙의 미간에 하나 둘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다.
“저기…나이트윙? 내가 왜요?”
대뜸 눈앞에 들이밀어진 낯선 갈색 물체를 두 손으로 쭉 밀어내며 뒷걸음질을 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두 손을 잡고 붕붕 소리가 날정도로 흔드는 녀석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누가 제일 익숙하냐고 물어봤더니 블루비틀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기에 데려왔다.”
“전 저 녀석 누군지 모르는데요.”
“…응?”
“저 쪽에서 일방적으로 아는 거 아닌가요. 전 정말…….”
“아 저기 블루? 블루? 블루? 블루?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섭하지. 물론 날 모를 수도 있어. 지금부터 알면 되는 거 아닐까?”
“…….”
할 말을 잃었다.
어느새 엉겨 붙은 둘을 바라보던 나이트윙이 무선 통신기를 켰다.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비록 통신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사소한 사실은 역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예? 뭐라고요? 알겠습니다. 나이트윙 아웃,”
여기서 한 번 태클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눈앞에 바로 얼굴을 들이밀고 정신을 쏙 빼놓는 녀석 때문에 슬슬 멀어지는 나이트윙에게 말을 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이트윙이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보일 때는 이미 늦어 도저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사라진 나이트윙은 간 곳이 없었고, 황량한 공터엔 시끄러운 갈색 생물체만 남아있었다. 조용한 장소에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 팔을 꽉 잡고 있는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 입을 막았다.
“입 좀 다물어봐. 시끄러워.”
“으어흐어.”
“말 하지 말라고! 야, 간지러워!”
끊임없이 웅얼대는 입술이 손바닥에 붙어올 때마다 하이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저히 입을 다물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입에서 손이 떨어지자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하이메를 바라보던 임펄스가 쪼르르 옆에 와서 앉더니 또다시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탄로날까봐 잔뜩 신경을 쏟고 있는데 눈앞에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근데…어…이름이 뭐라고 했지?”
“응? 바트 앨런. 물론 저 쪽에선 날 임펄스라고 부르기도 하더라고. 근데 둘 다 상관없어.”
“저기…시크릿 아이덴티티는?”
“그게 뭐가 중요해? 하. 정말 이 시대는 쓸데없는 걸 너무 신경 쓴다니까. 안 그래? 친구.”
언제부터 우리가 친구였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들을 만한 녀석도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 먼저 항복한 쪽은 하이메였다. 벤치에 앉아 부산스럽게 다리를 움직이고 있는 임펄스는 조금만 바라봐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래. 우리 통성명은 제대로 안했지만 친구라고 치고, 시크릿 아이덴티티 오픈했다고 치자.”
“응? 블루. 왜?”
“일단…일단 말이야. 너 혹시 다른 옷은 없냐?”
“왜?”
“그렇게 입고 다니면 튀잖아. 미래에선 뭐 그다지 상관없다 하더라도 여긴 아냐. 알았어?”
“…딱히 가져온 거 없는데?”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넙죽넙죽 대답하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시간 여행자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렇게 대책이 없을 수가. 한참 말을 고르던 하이메가 바트의 손을 덥석 잡고 일으켰다. 순순히 따라오는 녀석을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